
‘IT 강국’ 대한민국은 슈퍼컴퓨터를 활용할 연구 분야가 거의 없는 것일까. 적어도 ‘톱500(www.top500.org)’의 최근 조사를 바라보는 우리 국민들은 이렇게 오해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전 세계 슈퍼컴퓨터 순위를 6개월마다 기록하는 ‘톱500’이 지난 12일(미국 시각) 30차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린팩 벤치마크’ 기준으로 전 세계 슈퍼컴퓨터의 연산 성능을 순위별로 나열한 자료로, 전 세계 성능이 공개된 슈퍼컴퓨터를 대상으로 한다.
이번 조사에서 로렌스 리버모어 연구소가 설치한 IBM ‘블루진/L’이 세계 최고속 슈퍼컴퓨터에 올랐다. 이 모델은 478.2 테라플롭스(teraflops)를 기록, 2위인 독일 윌리히에 설치된 IBM ‘블루진/P’(167.3 테라플롭스)를 거의 3배 차이로 따돌렸다. 테라플롭스란 중앙처리장치(CPU)가 초당 몇 조 회를 연산을 할 수 있는지 계산하는 단위다.
올해 전 세계 슈퍼컴퓨터 시장은 IBM과 HP 등 전통적인 글로벌 IT 기업들이 영향력을 이어갔다. 특히 핵심 부품인 중앙처리장치는 ‘인텔’이 70%(354대)를 차지하며 고성능 컴퓨터 시대를 이끌었다. 특히 한 제품에 연산장치가 여러 개 내장된 ‘멀티코어’를 채택한 컴퓨터가 크게 늘었다. 이번 명단은 지난 10일 미국 리노에서 열린 ‘국제 슈퍼컴퓨팅 콘퍼런스(SC 2007, sc07.supercomputing.org)’에서 일반에 공개됐다.

◆전 세계 슈퍼컴 ‘잰걸음’…한국 슈퍼컴 ‘뒷걸음’ = 국가별 순위에서는 미국이 284대로 과반수를 넘겼고, 유럽이 149대로 두 번째였다. 모두 58대가 있는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20대, 대만 11대, 중국 10대, 인도 9대에 달했지만, 한국은 단 한 대에 불과했다. 이 장비는 바로 72위를 기록한 기상청의 ‘크레이 X1E(Cray X1E, 4GB)’다. 최근 운용능력 논란에 휩싸였던 기종이다.
세계 10대 슈퍼컴퓨터의 국적을 살펴보면 미국 7대, 독일 1대, 인도 1대, 스웨덴 1대다. 이번 조사에서 가장 눈에 띈 것은 117.9 테라플롭스를 기록, 4위를 차지한 ‘인도’의 슈퍼컴퓨터다.
인도의 약진을 바라보는 한국 과학자들은 씁쓸하기만 하다. 우리나라는 500대 슈퍼컴퓨터 조사에서 지난 2001년 16대로 최고치를 기록한 후, 10대 안팎의 고성능 슈퍼컴퓨터를 보유하며 꾸준히 세계 10위권을 유지해 왔다. 그러나 지난해부터 중국, 인도 등 주요 국가들의 공격적인 투자에 밀리며 10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결국 지난해 6월 4대, 지난해 11월 6대, 올해 6월 5대에 그치더니, 이번 조사에서는 단 1대로 떨어지는 수모를 당했다.
우리나라가 고성능 슈퍼컴퓨터 주변국으로 밀려나 버린 이유는 간단하다. 신기술의 성장 속도에 맞춰 전 세계 슈퍼컴퓨터 성능은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지고 있다. 이번 조사에서 500대 슈퍼컴퓨터의 전체 성능 총합은 6.97 페타플롭스(PFlops)에 달했다. 6개월 전 4.92 페타플롭스, 1년 전 3.54 페타플롭스에 불과했던 것에 비해 성장 속도가 점점 더 빨라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끊임없는 관심과 투자를 통해 성능 개선이 이뤄져야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는다. 기상청 컴퓨터 역시 지난 6월에 실시한 조사에서는 14위를 기록했지만 이번에 72위로 급락했다. 앞으로 지속적인 투자가 없는 한 얼마나 더 미끄러질지 전혀 예측할 수 없다.
이와 달리 주요 산업분야에서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미국, 독일, 영국, 일본 등은 대부분 500위권에 드는 초고성능 슈퍼컴퓨터를 최소 수십 대 이상 꾸준히 보유하고 있다. 특히 방위 산업이나 정보기관, 정유회사, 금융회사 등에서 보유하고 있는 슈퍼컴퓨터 중 상당수는 순위 집계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국내와의 격차는 더 벌어질 것이 자명하다.
이번 전시회에 참석한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 이식 박사는 “우리나라 경제 규모로 볼 때 슈퍼컴퓨팅 능력 순위는 세계 10~15위는 돼야 정상”이라며 “주변국들이 급성장 할 때 오히려 뒷걸음질을 하는 셈”이라고 말했다.
전시회에 참가한 권대석 클루닉스 대표 역시 “슈퍼컴퓨터를 도입하면 경쟁력이 올라가니 무작정 더 많이 도입하자는 주장이 아니다”며 “슈퍼컴퓨터를 잘 쓸 수 있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더 많은 슈퍼컴퓨터가 지속적으로 도입되고 국가 경쟁력이 향상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과학기술계 전반에서 슈퍼컴퓨터를 이용해 경쟁력을 키우려는 투자와 인력양성 시도가 범정부적인 차원에서 이뤄지지 않는다면 슈퍼컴퓨터를 지속적으로 보유 활용할 능력이 있는 선진국을 따라가지 못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슈퍼컴퓨터는 IT 활용능력 척도 = 슈퍼컴퓨터는 주로 기초과학이나 핵심 기술, 원천 기술이나 고부가가치 산업 분야에서 사용된다. ‘우주 생성의 원리’ ‘원자폭탄 실험’ ‘자동차 설계’ 등 실제로 실험할 수 없거나 실험 시간 및 비용을 줄여야 할 경우에 활발히 활용되고 있다. 따라서 슈퍼컴퓨터 보유 대수가 적다는 것은 사회 전반에서 활용도가 낮다는 것을 의미한다. 활용 빈도가 낮으니 슈퍼컴퓨터 도입이 지지부진하고, 슈퍼컴퓨터가 없으니 고부가가치 산업 경쟁력을 올릴 수 있는 조건이 확보되지 않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현재 2009년 상반기까지 300억 원 규모로 진행될 예정인 KISTI 슈퍼컴4호기(250 테라플롭스)가 도입 완료되면 500대 순위는 다소 상승하게 된다. 그러나 근본적이고 체계적인 대책이 마련되지 않으면 주변국에 다시 따라잡히는 것은 시간문제다.
단순히 슈퍼컴퓨터를 몇 대 더 구입하는 미봉책으로는 주변 국가에 쉽게 추월당할 수밖에 없다. 사용 방식에 맞는 소프트웨어나 미들웨어 등 관련 원천기술 및 응용기술 개발, 그리고 전문 인력 양성이 꾸준히 병행돼야 한다.
KISTI 관계자는 “미국-일본산 중앙처리장치 일색인 슈퍼컴퓨터는 사실 ‘껍데기’일 뿐이고, 실제로 슈퍼컴퓨터를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이 제조업이나 금융업 등 핵심 산업의 경쟁력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며 “10위권 인프라를 유지하기 위한 정부 차원의 지원 및 관련 법안 마련이 시급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인터넷뉴스부 서명덕 기자 / 이 기사는 신문 지면에도 게재됐습니다.
슈퍼컴퓨터 500위 기사에 이은 후속기사입니다.^^ 여러가지 의견들을 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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